덴마크는 약소국(弱小國)이었다. 인구가 약 500만이며 국토면적이 한반도의 1/4에 불과한 작은 나라다. 북해의 찬바람이 쉴 새 없이 몰아치고 햇빛이 매우 귀한데다 땅이 메말라 쓸모 있는 땅이 넉넉하지 못한 작은 나라다. 설상가상(雪上加霜)으로 150년 전 철혈재상(鐵血宰相) 비스마르크가 이끈 프로이센과의 전쟁에 패배해 그나마 괜찮은 땅이었던 홀슈타인 지역을 빼앗겨 버렸다. 많은 젊은이들이 전쟁터에서 죽고 다쳤고 국토는 폐허가 됐다. 그야말로 온 나라가 신조어인 ‘멘붕’ 상태에 빠진 것이다. 국민들이 너나없이 술과 도박에 빠졌고, 서로 헐뜯고 싸우는 망국의 신세로 전락했다.
그런 시국의 현실을 타파하고자 시인이자 목사인 그룬트비는 “인재를 키워 나라를 다시 세우자”며 깃발을 들어 학교를 세웠다. Volk Schule, 우리말로 옮기면 백성학교(百姓學校)다. 월사금도, 입학자격 제한도, 나이 제한도 없었다. 배우고자 하는 열정만 있다면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뽑았다. “밖에서 잃은 것 안에서 찾자”는 정신교육과 함께 농업기술을 가르쳤다.
이로 인해 덴마크인이 자랑으로 여기던 역사를 가르쳐 국가의 자존심을 세웠고 퇴비제조법, 목초밭 관리법, 젖소 기르는 방법, 치즈와 버터 만드는 방법 등 1차 산업의 근간을 마련했다. 늙은 학생들의 만학은 주경야독으로 이뤄졌다. 밤에 학교에서 배운 내용을 다음 날 농사현장에 적용하며 공부를 했다. 점차 근검 성실한 백성들이 늘어났다. 달가스라는 퇴역장교가 깃발을 하나 더 들었다. 나무를 심어 나라를 푸르게, 국토를 기름지게 만들자는 국민운동을 펼쳤다. 뜻을 같이하는 지역 청장년들이 모여 ‘히스협회’를 만들었다. 척박한 땅을 비옥하게 만드는 일과 거센 바닷바람을 견디는 수종을 찾아내는 일에 힘을 모았다. 마침내 속성수(速成樹)인 포플라를 온 나라에 심었고 수년이 지나자 산천이 푸르러지기 시작했다. “나라가 망한 판에 그까짓 학교는 세워서 뭐해!”, “학교에 다닌다고 밥이 나오나 돈이 나오나?”, “어느 세월에 나무가 크고, 젖소가 자라서 우리 살림에 보탬이 되겠어?” 비아냥대던 사람들도 꼬리를 감췄다.
필자는 2001년 여름 배낭여행으로 덴마크 코펜하겐에 있는 ‘백성학교’ 연합회를 찾아갔다. 풍전등화(風前燈火)의 위기에서 덴마크를 살려낸 인재들을 양성했던 역사의 현장감이 묻어났다. 당시 전국 90개가 넘었던 학교의 허름한 교사(校舍)에서 주경야독하던 학생들의 모습이 자랑스럽게 사무실 벽에 그려져 있었다. 현재는 60여 개의 백성학교가 문화예술을 수업하는 교과과정 형태로만 운영되고 있어 100여 년 전 장하고 간절한 기개가 찾아볼 수 없었지만 한 시대의 큰 몫을 수행한 늠름함이 자리잡고 있었다.
그룬트비와 달가스의 인재양성의 목표는 ‘위대한 평민’이었다. 특출한 소수의 지도자를 키우기보다는 방방곡곡에서 국민의 기(氣)를 살리고, 가축을 기르고, 포플라를 심어 나라의 근간을 세우는 인재를 양성하는 일이 우선이었다.
이 ‘위대한 평민’들이 약소국(弱小國) 덴마크를 국제신인도지수 2위, 경제규모 15위의 강소국(强小國)으로 바꿔놓았다.